제 5회 두통이야기 당선작 모음
2024-01-16

1등 당선작 "20년째 편두통 환자가 바라보는 40년째 편두통 환자, 나의 어머니" 60대 (주체:가족)

 

2023년 제 5회 두통 수기 공모전 공지를 확인하고, 5년째 응모를 고민하다 이번에는 작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민한 이유는 하나, 응모 주체를 환자로 할지 가족으로 할지 였습니다.

20년째 편두통 환자인 저는 40년째 편두통 환자인 나의 어머니의 딸입니다. 누가 더 오래되었는가, 누가 더 아픈가, 약을 복용하였는가, 주사를 맞았는가, 효과가 더 있었는가가 아닌, 누구를 주체로 썼을 때 편두통 예방과 중요성을 더 명확하게 기재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하였습니다.

40년째 편두통을 앓고 나서야 희망이 보이는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로 응모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가벼운 편두통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다.

편두통이 제대로 한번 시작되면 꼬박 하루 동안은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하였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바람에 어느 정도 나아지면 며칠 동안 치아가 아프다고 할 정도셔서 버텨주신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신경과’ 에서 진료 본 것은 약 5년 전입니다.

그 전까지는 가까운 병원 또는 약국에서 이부프로펜,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의 진통제만 복용 하였습니다.

딸인 제가 신경과 진료를 보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치료법도 놀라웠지만 예방법이 있다는 것은 알고,

어머니에게 적극 추천하여 5년전부터 노원을지병원 신경과 김병건교수님께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편두통은 어머니에게는 오래도록 앓고 있는 ‘병’입니다.

이에 편두통 오기 전 ‘아 조금 있으면 오겠구나 큰일났다’ 전조 증상은 충분히 느껴지지만, ‘예방 치료’ 를 몰랐던 저희 모녀에게는 그 동안 통증을 맞이하거 나서 버티고 약물 치료해야 하는 병인 줄 알았습니다.

 

교수님과 진료보며 예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픔이 오기 전에 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교수님께 진료와 필요 검사를 하고 난 뒤 ‘편두통’ 진단을 받고 치료 방향에 대하여 상담하였고 현재 어머니는 복용하는 약물이 많아, 매일 복용하는 예방 약물은 가능한 최대한 미루고자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예방치료로 보툴리눔톡신 주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짧은 시간, 진료실에서 교수님께 투여 받은 보툴리눔톡신은 통증도 없고 오히려 체했을 떄 손 따는 것과 같이 시원하다고 표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이후 한동안은 예민한 혈관 탓에 뒷 목에서 올라오는 두통이 차단되는 느낌를 감지하셔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보툴리눔톡신 주사를 맞고 똑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집에는 항시 비상시에 복용할 트립탄 계열 약물 세 종류를 구비해두고 있습니다.

예방 치료에 효과를 보고 나니, 주기적으로 투여 받게 되었고 아쉽게도 효과가 지속되는 기간은 점점 짧아졌습니다.

어머니의 두통일기앱에 두통 있는 날 표시는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잠시, 다음 이야기를 위해 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딸인 저는 임상시험에 적극 참여하는 환자였습니다.

저의 참여로 안전성이 확인되어 편두통를 앓고 있는 많은 환자분들에게 다양한 예방, 치료법이 국내에 도입될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면 전부 참여하여 경험하고 필요성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연구 관련 기사를 보면, 교수님이 하시는지 먼저 확인하고 달려갔습니다.

 

저는 CGRP 항체주사 국내 도입 전 임상시험 참가자 였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위약일 수도 있었습니다만, 참여 하여 투여 받는 기간동안 저는 완벽한 ‘완치’ 일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국내 출시와 동시에 교수님께 제일 먼저 달려간 환자 중 1명입니다.

저는 CGRP 항체 주사 투여에 적합한 환자로써, 3개월 동안 월 1회 투여는 저에게 1년을 완치 ‘일반인’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후에는 예방 약물을 복용하였는데, 예전보다 예방 약물도 더 효과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재 CGRP항체 주사 투여한지는 1년 되었고 예방 약물 지속 복용중이지만 편두통은 90% 치료되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통증이 시작되면 교수님과 상의하여 재투여 하고 싶습니다. 급여화 해당 대상이 아닌 관계로 비용은 부담되지만 다른 치료법 보다 저와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CGRP 항체 주사 때문에 저의 이야기를 기재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효과를 크게 본 CGRP 항체 주사는 어머니에도 가능한 처방임을 확인 후 어머니에게 적극 추천 하였지만, 아쉽게도 어머니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10년째 2형 당뇨병으로 인슐린을 투여하는 당뇨 환자이기도 합니다.

CGRP항체 주사는 배 또는 허벅지 안쪽에 투여하는 방식이지만, 어머니는 매일 아침 투여하는 인슐린에 충분히 힘들다고 거부하셨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고 안타까웠습니다.

2년전부터 편두통이 유독 심해지셨는데 강원도에서 거주하시며 직장에 다니고 계셔서 서울에 자주 나와 진료를 볼 수 없는 환경이시기에 자가투여로 편두통 치료가 가능한 CGRP항체 주사는 정말 어머니에게 필요하다 생각되었는데 제가 효과를 봤다고 억지로 권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번 2023년도 대한두통학회 관련 기사에서 경구용 CGRP억제제가 허가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사 제목도 ‘두통학회 신약 단비’ 였는데 정말 가뭄의 단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기사 공유 드리니 ‘교수님께서 처방만 해주신다면 복용해보고 싶다’ 라는 답변을 받았을 때, 이번에는 도전해 볼 수도 있겠구나 싶어 기쁩니다. 곧 저는 정기적으로 진료보는 날이 다가옵니다.

교수님과 빨리 상의해보고 싶어서 진료일이 기다려집니다.

 

저는 ‘두통없는 행복한 세상’ 홈페이지와 대한두통학회 ‘유투브’ 구독자입니다.

행사 소식을 보고, 2023년 2월경에 한 온라인 대중강의도 참여하고, 8월에 한국두통환자 지지모임(KPAC)도 온라인으로 참여했었습니다.

당시 의료진분들과 환자분들의 질의 응답 시간이 인상 깊었습니다.

환자분들의 질문은 용어부터 약물명까지, 다양하고 수준 매우 높아서 보는 내내 두통 환자분들은 치료가 절실하여 많이 공부하는구나를 느꼈고,

의료진분들은 퇴근 후 강의까지 한 후 질의 응답 시간임에도 힘든 내색 없이 성심성의껏 답변 주시느라 오히려 시간 부족으로 안타까워 하는 열정도 느껴졌습니다.

보이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두통 환자분들을 위해 애써주시는 의료진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로 응모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모녀의 두통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머리 아프다’는 말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결코 가볍게 흘릴 말이 아닙니다.

이 글이 게시되어 누군가가 읽게 된다면,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 혹은 반복적으로 ‘머리가 아플 경우’ 참지 말고 꼭 가까운 ‘신경과’ 진료를 보시고 추측이 아닌 진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현재 전문 의료진과 발달 된 최신 의료 기술을 보유한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등 당선작 "G43.0" 10대

 

정적이다. 아닌가? 

아니다.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불안해진다. 이제 나는 생각이라는 굴레에 갇혀 당분간 빠져나오지 못할 예정이다. 

걱정은 없다.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이기에. 

다만 귀를 울리는, 달팽이관을 강타하다 못해 전정와우신경까지 건드리는 듯한 이 소음은 언제나 적응되지 않는다.

졸리다. 그러나 한동안 잠들지 못할 예정이다.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G43.0 이라는 녀석 때문에. 3년 전인 2021년 5월, 안 그래도 예민한 중학교 2학년인 나에게 갑작스레 등장한 이 녀석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덕분에 꽤나 꼼수 좀 부렸으니 말이다. 물론 진심으로 아픈 날들도 있었지만 안 아픈 날에도 학원을 쉬려고 아픈 척을 했다는 걸 솔직하게 털어놓겠다. 그때는 그저 학원을 빠질 핑계가, 양심에 찔리지 않는 핑계가 있다는 사실에 머리를 쥐어짜는 고통 정도야 눈 감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낙엽이 지고 10월이 됐을때 심각성을 깨닫고 병원으로 향했다.

 

두통에도 종류가 있는지 몰랐던 나는 편두통을 진단 받았다. 

그리고 내가 요새 구토를 자주 하고 눈이 빠질 것 같이 아프고 눈 앞에 이상한 벌레들이 아른거리는 것도 편두통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나서 찾아간 신경과에서 해본 검사가 뇌혈류검사였는데, 검사 받기 전 교수님께 여쭤봤다. 혹시 검사 결과가 정상이면 어찌하냐고. 나는 내 아픔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냐고.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문제가 있기를 바랬다. 주변 어른들이, 또 선생님들이 납득하실 수 있으실만한 증거가 필요했다. 이런 나의 바램이 통한건지 뇌혈류 속도가 빠르다고 하셨다. 아예 문제가 없이 깨끗하던 MRI와 달리 이번에는 어디가서 왜 머리가 아프냐는 질문에 조금은 의학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크레밍을 먹기 시작할때즈음 나는 우울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관계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한창 친구들과 어울릴 시기에 나도 물론 그들과 어울렸다.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내가 얼마나 아픈지 몰랐을 것이다. 어느 날은 스스로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빛나던 눈은 반쯤 감겨 생기를 잃었고 실내화 주머니을 쥐던 손은 그 힘을 잃었다. 그리고 멀쩡한척 연기한 그 대가로 몰려온 통증에 대응하기 위해 거의 매일 크레밍을 먹었다. 그러다 어느날 통증이 최고를 찍더니 크레밍을 먹어도 내려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약물과다복용으로 인한 두통이 새로 생긴 것이다. 그때 하필 두명의 친구와의 관계가 무너졌다. 믿음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 중 한 명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파서 학교 나오는 게 힘들면 그냥 관두라고. 내가 널 왜 이해해줘야 하냐고.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나는 이해를 바란적이 없었다. 두통을 겪어보지 않고서 고작 머리가 아픈것 때문에 학교를 빠지고 그정도로 아파하냐며 의아해하고 꾀병인줄 아는게 주변의 반응이었기에 남들이 나를 이해해주길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사과를 바랐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인 지금도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내가 아파도 이정도로 공부할 수 있다고. 나는 아파도 할 수 있다고. 진심이라고. 그런데 그 친구는 한순간에 나의 노력과 의지를 짓밟아 버렸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잠겼다. 매일 밤 물에 잠긴 것처럼 호흡을 가쁘게 쉬었고. 내 마음을 굳게 잠궜다. 이런 내 곁에 있어준 ‘진짜’ 친구들에게 잠시 고마움을 전한다. 

 

시간이 흘러 어영부영 졸업한 후 나는 입원치료를 통해 케프라를 만났다. 케프라를 만나기까지 긴 여정이었지만 지금 현재까지도 케프라를 복용중이다.

 

2023년, 여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일주일즈음 후 자퇴한 뒤 국제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국제학교에서의 생활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처음 한달은 엠겔러티를 맞은 덕분인지 별 탈 없이 지나갔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엠겔러티를 4번째 맞았을때부터 효과가 현저히 줄었다. 사실 생략했지만 크레밍때의 기억을 외면한체 세브란스에서 받은 약을 또 과도하게 먹었다. 살려면 진통제가 필요했으니까. 그렇지만 현재는 아예 진통제를 먹지 않는다. 참을만해서가 아니라 그 두 번의 기억이 내가 진통제를 먹는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지금은 엠겔러티를 더블도주, 보톡스,

그리고 후두신경차단술도 받아보는 중이다. 문제는 내가 지쳤다는 것이다. 아직 편두통 3년차 밖에 안된 10대가 뭘 벌써 지쳤냐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힘들다. 엠겔러티는 내가 맞아본 주사중에 손에 꼽힐 정도로 아프다. 보톡스도, 후두신경차단술도, 다 아프다. 가끔은 맞다가 아파서가 아니라 서러워서 눈물이 나온다. 그냥 다 서럽다. 그와 동시에 두렵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할까봐. 그렇기에 더욱 증명해보이고 싶다. 내가 아직 기회를 가지고 꿈을 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걸. 물론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다잡아도 집중을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책상에 앉아본다.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마무리를 지으며 그동안 내곁을 지켜준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늘 최선을 다해주시는 나지훈 교수님, 김종민 교수님, 그리고 강남세브란스의 간호사 분들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같은 청소년 두통환자들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힘을 얻어갔으면 좋겠다. 우리에겐 아직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2등 당선작 "지속적인 안구통증? 군발두통을 의심해보세요!" 20대

 

중학교 3학년 가을날, 극심한 고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에는 눈이 너무 아파서 눈을 잡고 고통이 사그라들 때까지 깨어있었다. 1시간이 지난 후 고통이 사그러들었고 잠을 다시 잤다. 새벽에 잠깐 아팠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 다음날에도, 그 다다음날에도 똑같이 새벽에 지속된 통증에 어머니와 함께 안과를 찾아갔다. 집 근처에 있는 동네 안과에 가서 눈에 관한 검사는 다 받았고 검사결과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때쯤 신상 휴대폰에 푹 빠져있을 시기라 어머니께 휴대폰을 그만 보라는 핀잔과 함께 내 고통은 꾀병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 당시 휴대폰을 많이 보면 눈이 아프니깐 나 역시 눈을 많이 써서 생긴 통증이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동안 잠깐 생긴 통증은 그 이후에 다시 생기지 않았고 나는 언제 아팠는지도 모르게 일상생활을 멀쩡히 이어 나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때쯤, 새벽에 다시 고통스러운 통증을 맞이했다. 저번에 느꼈던 똑같은 안구 통증이었다. 역시 잠을 못 잘 정도로 너무 아팠고 눈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이번엔 조금 더 큰 대형 안과를 방문했고 녹내장 검사, 백내장 검사, 망막검사, 시력검사 등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다 한 것 같다. 역시 안과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난 너무나 아팠고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이 상황이 억울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내 안구 통증은 사라졌고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 이후로 봄, 가을 1년에 2번씩 환절기 때 내 안구 통증은 일주일 간격으로 찾아왔는데 너무 아프지만 버틸만한 통증이었기에 나는 매번 그 통증을 감내했다. 성장기 때는 분명 아팠지만, 죽을 만큼 아픈 통증이 아니었고 통증의 시간이 비교적 짧았으며 새벽에 잠깐 아팠기 때문에 일종의 단순한 계절병정도로 생각했다. 정확히 관자놀이와 오른쪽 눈 뒤에 있는 어떤 부분이 죽을 만큼 아파지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 봄, 가을 환절기 때 안구 통증이 심해지는 것은 4년이 지나면서 학습된 상태였다.

 

내가 20살 새내기가 되던 해인 어느 봄, 이전과 사뭇 다른 통증에 잠에서 깨어났고 세상에 그렇게 아픈 통증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누가 내 눈을 칼로 후비는 것 같은 통증에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옆에 자고 있던 룸메를 깨워 부축받아 학교에 있는 보건실로 갔다. 보건 선생님께 눈이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타이레놀을 달라고 부탁드려서 빈속에 약을 털어 넣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지는 안구 통증에 나는 정신을 못 차렸고 분명히 눈에 큰 이상이 있음을 직감했다. 진통제를 먹어도 진정되지 않는 이 통증은 2시간가량 지속되고나서 사라졌다. 정말 다시 겪고 싶지 않은 통증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켜서 안구 통증, 관자놀이 통증, 오른쪽 두통 등 여러 단어를 검색했고 연관 검색어에 ‘군발두통’이라는 검색어가 나왔다. 군발두통을 이때 처음 마주하게 된다. 처음보는 단어에 난 궁금증이 생겼고 군발두통을 눌러 자가진단을 읽으며 난 90% 확신했다. 날 환절기마다 지옥 불구덩이로 빠뜨리는 못된 질병이 바로 군발 두통이라고.. 사실 신경과에 가서 진단을 받고 병을 치료해야 하는데 신경과를 방문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내과, 이비인후과, 안과와 같이 똑같은 병원일 뿐인데 신경과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방문이 꺼려졌다. 신경과가 익숙지 않아서 내가 그 당시에 너무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아픈 사람들이 가는 병원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네이버 설명에 100% 산소 흡입이 통증 감소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보고 검색의 도움을 받아 근처 가스 업체에 산소를 구매하러 갔다. 부모님께 손을 벌려 거금을 주고 40L와 10L의 산소를 구매했다. 군발두통은 의료보험이 불가능해서 자비로 산소를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안아플 수 있다는 희망이 날 설레게 했다. 기숙사에 산소 반입이 금지된다고 하여 일주일동안 질병계를 내고 본가에 가서 군발두통이 왔을 때 산소 흡입을 하였다. 산소의 첫 느낌은 텁텁한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분당 12L로 30분 흡입했으며 3시간 정도 지속되었던 통증이 30분 이내로 빠르게 통증 시간이 감소했다. 나 같은 경우는 밤에 잘 때 군발두통이 와서 일방적으로 고통에 당하는 편인데 산소를 마신 이후 안아플 수 있음에 기뻤다. 하지만 통증 강도가 6 이상으로 넘어가면 산소 마신 직후는 괜찮지만 산소를 때면 통증이 다시 올라갔다. 산소를 3시간 동안 마실 수 없는 노릇이어서 다른 해결책이 필요했기에 최후의 보루로 남겨둔 신경과에 방문했다. 신경과의 첫 방문은 그냥 똑같은 병원이었다. 지레 겁을 먹고 병원 방문을 피했던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예상한대로 난 군발두통을 진단받았고 매년 신경과를 방문해 예방약, 급성기약을 처방받아 약물의 도움을 받고있는 상태다. 스테로이드를 먹으면 통증이 사라지는데 부작용이 너무 심해서 조믹정과 산소로 현재 고통을 다스리고 있다. 지금 나이는 24살이고 군발두통 9년 차 환우이다. 내가 겪고 있는 군발두통은 자살 두통이라고 불린다. 자살할 만큼 너무 아파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통 강도가 최고조일 때 속이 매스껍고, 불빛과 소리는 나를 공격하는 적이 되며, 머리 안에서 누가 망치를 들고 눈 속 신경을 때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고통이 보통 3시간 동안 지속된다. 너무 아파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거리는데 정말 두통이 오면 죽을 만큼 아파서 미쳐버릴 것 같다. 이 두통이 관해기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번 시작한 군발두통은 반드시 끝나게 되어있으니깐 군발두통이 시작되면 군발두통이 끝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군발두통이 끝난 날은 목 뒤쪽과 머리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군발기간이 끝나면 밀렸던 잠을 한꺼번에 자는데 자고 일어났을 때 머리가 안아프면 드디어 끝이라는 해방감과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듯 아프지 않음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모든 군발두통 환우분들이 힘을내고 살아가셨으면 좋겠다.  

 

3등 당선작 "편두통이지만 씩씩하게!" 40대

 

“신이시여,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라인홀트 니부어의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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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20대 중반부터 편두통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쩌다 한 번 오는 두통이었지만 결혼 후 첫 아이를 낳고나서 매달 한두 번씩은 꼭 두통이 오게 되었고 둘째 아이를 낳은 후에는 더 자주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직장에 있는 동안 두통이 시작되 기라도 하면, 당장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기 옆에서 나는 최소한의 할 일만을 겨우 해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려 울었다. 그 전 직장에 다닐 때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 불현 듯 두통이 시작되면 무척 난감했다. 안간힘을 다해 일을 마친 후 밀려오는 구토와 어지러움, 머 리를 사정없이 두드려대는 고통을 안고 새하얗게 질려 집으로 돌아와서는 어두운 방에 누워 제 발 가라앉기만을 빌었다. 증상이 심해질수록 언제 두통이 올지 몰라 밖에 나가는 약속 잡기를 점점 꺼려하게 되었고, 이번 두통이 지나가면 다음에 또 찾아올 두통을 미리 두려워하며 절망스 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삶을 옭죄어오는 이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 길은 보이지 않 았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가늠되지 않는 아득한 길 위 에 수년을 막막하게 서 있었다.

 

그러던 중 인터넷 검색에서 두통에는 병원 약을 처방받아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글을 보게 되 었다. 그동안은 시중의 일반진통제가 듣지 않으니 막연히 그냥 앓아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체 왜 병원에 가본다는 생각은 못 했던 걸까. 처음에는 어떤 병원을 찾아가야하는 건지도 알 기 어려웠지만 정보 검색으로 신경과 진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찾아냈고, 드디어 토요일 남편에 게 아이들을 맡기고 근처 병원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MRI 검사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전 형적인 편두통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편두통.

내가 겪는 고통은 명백한 이름이 있는 질병이었다. 네가 예민해서 그렇다는 둥, 스트레스를 너 무 받아서 그렇다는 둥, 쉽게 마음만 바꿔 먹으면 사라질 것으로 가볍게 치부되던 고통이 비로 소 실재하는 심각한 고통으로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편두통은 머리에 느껴지는 통증 자체도 극 심하지만 구토감, 감각예민, 안구통증 등 편두통 환자만의 시그니처 증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연구로 고안된 치료방법이 있었다. 트립탄 계열의 급성기 약물 사용으로 두통 통증을 경감하는 방법도 있고, 예방약을 복용해서 두통이 일어나는 빈도와 강도를 감소시키는 방법도 있다는 것 을 의사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알게 되었다. 트립탄 약을 먹으면 스멀스멀 올라오던 두통이 말끔 하게 사라지는 신세계를 경험해보니 왜 이제야 이 약을 알게 된 걸까 괜히 원망스럽기까지 했 다! 지속적으로 병원 진료를 보면서 다양한 약을 먹어보았고 보톡스 치료도 받아보았다. 또 온 라인 카페를 통해 그 외에도 엠겔러티, 아조비 등의 효과적인 주사치료 약물이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행히 몇 가지 효과를 본 방법이 있어 나는 드디어 오래된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편두통은 완전히 고칠 수 있는 걸까.

한 때는 편두통이란 단어를 내 삶에서 삭제해버리고 싶었다. 너무 아파서 정말이지 죽고 싶을 때도 많았고, 이런 삶이 주어진 게 원망스러웠다. 내 경우 병원을 다녀도 편두통이 완전히 없어 지는 건 아니다보니 실망한 부분도 있었다. 어떤 치료들은 비싼 비용이 부담되었다. 약에 의존 하게 될까봐 겁이 나기도 하였다. 그러니 결국에는 죽어야 이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겠다는 절 망감이 들었다. 우울에 빠지면 터널 비전에 갇히게 된다. 시야가 좁아져 더 이상 다른 해결 방 법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심리치료이론 중에서 수용전념치료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 이는 사람이 당장의 고통을 회피 하기 위해 선택하는 왜곡된 행동들은 부적응적으로 고통을 지속시키지만,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삶에 전념하면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다. 슬프게도 편두통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불편한 삶은 피하고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편두통이 없는 사람처럼 살기를 목표로 한다면 당연히 매번 실망하고 평생 우울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나는 아픈 사람이고 이로 인해 겪게 되는 한계를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편 두통으로 인해 따라오는 좌절감과 무력감까지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내게 편두통이 있음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음식 조절이 나 수면 및 신체적인 관리를 통해 통증을 조절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그러면 완전하지는 않더라 도, 온전하게, 많은 것들을 지켜낼 수 있다. 게다가 아직 시도해볼 수 있는 치료 방법도 남아있 으니 미리부터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넓은 시야의 희망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전처럼 많이 아프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매달 일정한 날짜가 되어 어김없이 편두통 이 찾아오고 뒷목이 뻐근해지는 전조증상이 느껴지면 언제나 두려운 마음부터 든다. 영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그럴 땐 니부어의 기도문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독인다. 편두통에 대해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거쳐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병원의 정확한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아플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다. 비록 어떤 날은 아프지만, 그래도 내 삶에는 아프지 않은 날들이 더 많음을 잊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보려 한다.

 

3등 당선작 "나는 '두통 환자'이다" 20대

 

나는 ‘두통’ 환자이다.

 

최근 2년간 심한 두통으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꽤 고생했다. 

 

내 두통의 시작은 중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중간고사가 끝난 날, NRS 점수 4점 정도의 통증이 울렁거림과 함께 왼쪽 머리를 강타했다. 단순히 시험 스트레스라고 판단하고 시중에 파는 진통제(아세트아미노펜)를 먹었고 낮잠을 잔 후 회복하였다. 그때를 시작으로 한 달에 2번 정도 4점의 두통을 달고 살았다. 심할 때는 동네 병원에 방문하여 조제약(덱시부프로펜, 디멘히드리네이트)을 처방받아 복용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두통이 이렇게 심해질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일반인도 전부 가지고 있는 그런 통증이라고 생각했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두통은 나를 따라다녔고, 처음으로 동네 가정의학과 병원에서 조믹정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두통은 나날이 더 심해졌고 21살이었던 2022년 08월부터 이전과는 다른 두통이 생겼다. NRS 점수 9~10점, 왼쪽 눈을 날카로운 물체로 찔러 뽑아내는 듯한 통증. 아파서 나는 눈물인지, 두통의 증상인지 모를 정도의 많은 눈물을 흘렸다. 말로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아프기 시작했고, 신경과에 방문하였다. 그때 처음으로 두통은 일상생활에서 누구에게나 생기는 Event가 아닌 몸속에서 일어나는 Accident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경과 방문을 계기로, 유명하신 교수님과 동네 병원에서 열심히 치료받았다. 예방약으로는 베타차단제(인데놀), TCA 삼환계 항우울제(에트라빌), 항경련제(데파코트, 토파맥스), 칼슘채널 차단제(이솦틴) 중 가장 효과가 뛰어난 이솦틴과 리튬을 복용중이다. 급성기약으로는 트립탄 계열의 Sumatriptan, Naratriptan, Zolmitriptan, Almotriptan, Frovatriptan 그리고 맥각알칼로이드제 중 가장 효과가 좋은 알모그란과 낙센에프정을 함께 복용한다. 또한, 군발두통의 주기를 줄여주기 위한 이행치료로 스테로이드를 감량하여 사용하였다. 그 외로 중간에 후두신경차단술과 항CGRP제제를 맞으며 두통을 조절한다. 이처럼 두통의 빈도와 강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치료와 약물이 쓰이기 때문에 나도 열심히 논문과 각종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다. 작년 8월에 비해 많이 좋아져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두통이 없어지지 않아 꾸준히 신경과에 내원하여 주치의 선생님과 치료 방향을 고민한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소아청소년과, 가정의학과, 내과를 거쳐 신경과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더 빨리 진단받아 치료했다면 20대 초반의 내 삶을 모두 빼앗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꿈을 위해,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자하며 공부하던 시기 였는데 두통으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다른 수험생들이 책상에서 공부할 때, 병원 침대에 누워 진통제를 맞으며 책을 보았고, 남들이 연필을 잡고 공부할 때, 나는 눈물이 흘러나오는 눈을 부여잡고 책을 겨우 읽어 내려갔다. 내 두통 덕분에 ‘의사’의 꿈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두통 때문에 ‘의사’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까지 갔다.

 

매번 두통 치료법이 우리나라에서 조금 더 관대했다면 적은 부담감으로 치료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논문과 각종 학술자료에 있는 두통 치료법을 우리나라에서는 50%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항상 낙담한다. 부작용이 적으면서 가장 효과가 있는 산소치료는 급여로 인정되지 않아, 산소를 충하기 위해 환자들이 밤낮으로 충전소를 알아봐야 한다. 각종 트립탄제제의 나잘스프레이는 국내에서 허용되지 않아, 경구용으로 복용하지만 타이밍을 놓치면 군발두통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또한, 항CGRP주사는 큰 비용으로 환자에게 꽤 부담되는 비용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이 두통 치료에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그리고 내가 일찍 진단받아 치료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매일 후회한다.

 

내 두통에 관한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모두 하나같이 같은 반응이다. ‘그깟 두통으로 병원? MRI를 두 번이나 찍었다고? 입원했다고? 두통은 누구한테나 다 있는거 아니야? 나도 어제 머리 아팠는데’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괴로웠다. 누군가에게는 ‘그깟’ 두통일지 모르지만 내 삶을 무너뜨린, 죽음까지 결심했던 두통은 결코 나에게 가볍지 않았다. 가벼운 Event로 치부하기엔 내 삶에서 두통은 무겁고 커다란 Accident였다. 처음에는 저런 말을 들을 때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을 미워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 두통을 만든 것은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두통을 ‘질환’보다는 ‘스트레스’로만 보는, 머리가 아플 때 신경과가 아닌 동네 병원에 가는 이 세상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나는 두통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각종 SNS와 주변 사람들에게 두통의 종류와 치료법을 홍보하기도 하고, 내 기록을 꾸준히 남기고 있다. 아직은 세상의 변화가 미비하지만, 많은 환우분들과 신경과 선생님들의 힘을 모은다면 두통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두통이 하나의 질병으로, 활발한 연구를 통해 여러 진단법과 치료법이 생겨날 때까지 나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싶다.

 

나는 ‘두통 환자’이다.